영조가 약에 이름을 내린 날¶
민성의담 · 열여섯 번째 이야기
이중탕이 건공탕이 된 사연, 그리고 약을 권하던 손자
왕이 공을 세운 신하에게 상을 내리는 일은 낯설지 않다. 그런데 『영조실록』에는 탕약이 공을 인정받아 새 이름을 얻은 날도 있다.
영조 34년, 1758년 음력 12월 21일이다. 실록은 왕의 병세가 조금 나아졌다고 적은 뒤, 영조의 말을 짧게 전한다.
此理中湯之功也。 “이는 이중탕의 공이다.”1
영조는 이중탕에 ‘이중건공탕(理中建功湯)’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건공은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자신을 낫게 하는 데 공을 세운 약이라며, 그 일을 이름에 남긴 셈이다.
약 이름에 남은 왕의 칭찬¶
날짜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달 12일에 약방이 이중탕을 달여 올렸다는 기사가 나온다.2 그로부터 아흐레 뒤, 몸이 조금 나아진 영조는 그 공을 약에 돌렸다.
사관의 표현도 눈여겨볼 만하다. 완전히 나았다고 쓰지 않고 ‘조금 나았다’, 곧 소유(少愈)라고 적었다. 왕의 칭찬은 크게 들리지만, 몸의 변화는 짧고 차분하게 남겼다. 어느 증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까지 이 기사에서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이중탕은 그날 새 이름을 얻었다. 인삼·백출 같은 약재 이름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한 사람의 치료 경험이 붙은 이름이었다. 그 사람이 조선의 임금이어서 약을 칭찬한 말까지 실록에 남았다.
이름은 거창해도 바탕은 네 약재¶
이중탕의 바탕을 이루는 약재는 인삼·백출·건강·감초다. 건강은 말린 생강이다. 이름만 들으면 귀한 약재를 잔뜩 넣었을 것 같은 건공탕의 이야기가, 이처럼 비교적 간결한 처방에서 시작한다.
이 계열은 영조 때 처음 생긴 처방이 아니다. 훨씬 앞선 『상한론』에 이중환이 실려 있고, 같은 대목에 탕약으로 달이는 방법도 나온다. 원문은 추위를 타는 양상이 두드러지고 물을 찾지 않는 구토·설사에 이중환을 제시한다.3 ‘이중(理中)’은 가운데를 다스린다는 말로, 전통의학에서 소화를 맡는 중초를 돌본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다만 이 네 약재의 기본 구성을 영조가 어느 날 복용한 약첩과 그대로 같다고 놓을 수는 없다. 이름을 하사한 실록 기사에는 당시의 가감과 분량이 적혀 있지 않다. 이중탕의 계보와 문헌별 구성은 처방 문서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건공탕이라는 이름은 이후에도 왕의 일상에 남았다. 영조 38년, 1762년 음력 11월 27일에는 사현합에서 진찰을 받고 건공탕을 하루 세 차례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4 이름을 내려 준 하루의 일화로 끝난 약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약을 드시라며 손자가 올린 글¶
그런데 약을 칭찬했던 왕도 늘 순순히 약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영조 43년, 1767년 음력 3월 17일. 왕세손이 할아버지에게 약을 드시라고 상소했다. 훗날 정조가 되는 손자다. 상소에 따르면 영조는 전날 올라온 유지양의 글로 마음이 번거로워져 탕약을 들지 않고 있었다. 왕세손은 건공탕을 하루라도 거르는 일이 걱정된다며 복용을 청했다.5
영조는 손자의 정성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답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건공탕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진찰 자리에서 삼령다를 마시는 것만 받아들였다. 그 답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의지한다는 말도 담겨 있다.5
왕세손은 다시 글을 올렸다. 삼령다를 허락한 것은 알지만, 건공탕은 아직 드시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번 글에는 같은 날 몇 번이고 청하겠다는 말이 들어 있다.
今日之內,雖至三疏四疏,不得請之前,臣何敢抑情而中止也哉?
“오늘 안에 상소를 세 번, 네 번 올리더라도, 청을 들어주시기 전에 제가 어찌 이 마음을 누르고 그만두겠습니까?”6
‘삼소사소(三疏四疏)’는 이미 상소를 네 번 올렸다는 횟수 보고가 아니다. 필요하면 그렇게까지 하겠다는 왕세손의 다짐이다. 그 말에 이어 ‘전청(前請)’, 앞서 드린 청을 다시 아뢴다고 적었다. 같은 약을 권하는 글이지만, 두 번째 상소에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이 더 선명해진다.
결국 영조는 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손자에게 물었다.
此文何時學乎? “이런 글은 언제 배웠느냐?”6
약을 드시라는 손자의 끈질긴 글에, 할아버지가 허락과 타이름을 함께 보낸 것이다. 정사를 둘러싼 긴장이 깔린 날이었으니 평범한 집안의 대화로만 볼 수는 없다. 그래도 그 문답에는 걱정하는 손자와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남아 있다.
처방집에 없는 약 이야기¶
처방집에서는 약재와 제법을 찾을 수 있다. 실록에서는 누가 그 약을 반겼고, 어느 날은 왜 먹지 않았으며, 누가 다시 권했는지를 만난다. 같은 건공탕이라도 읽는 책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드러난다.
영조의 기록이 오늘의 누구에게나 같은 약을 권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왕의 복용 경험과 지금의 치료 판단은 구별해야 한다. 이 일화에서 유난히 생생한 것은 약의 효능을 나열한 문장이 아니라, 약을 대하는 사람들의 말이다.
1758년의 영조는 약에 공이 있다며 이름을 내렸다. 1767년의 왕세손은 바로 그 약을 다시 드시라고 거듭 글을 올렸다. ‘건공탕’이라는 세 글자에는 왕의 칭찬도, 손자의 애타는 하루도 함께 남아 있다.
함께 읽기¶
이중탕의 구성과 문헌별 차이 · 구토·설사와 갈증을 함께 살핀 옛 처방 · 명종의 진어 기록에도 등장하는 경옥고 · 세종이 약초를 캔 사람까지 기록하게 한 사연
출전과 참고 자료¶
아래 실록 날짜는 음력이며, 인용한 한문은 이 글에서 우리말로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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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영조실록』 권92, 영조 34년 12월 21일 두 번째 기사. 왕의 병세가 조금 나아졌다는 기록과 이중건공탕 사명(賜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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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영조실록』 권92, 영조 34년 12월 12일 세 번째 기사. 약방이 이중탕을 달여 올린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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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론』 송본 계통, 「변곽란병맥증병치」 386조 「이중환방」. Project Gutenberg 공개 원문의 인삼·건강·자감초·백출 구성과 탕법. 영조가 복용한 개별 약첩의 구성이나 용량을 확인하는 자료는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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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영조실록』 권100, 영조 38년 11월 27일 첫 번째 기사. 사현합에서의 입진과 건공탕 진어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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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영조실록』 권108, 영조 43년 3월 17일 두 번째 기사. 왕세손의 첫 상소와 삼령다 복용을 허락한 영조의 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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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영조실록』 권108, 영조 43년 3월 17일 세 번째 기사. 왕세손의 재상소와 건공탕 진어를 허락한 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