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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초수, 효험이 엇갈리자 다시 조사하다

민성의담 ·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1444년 음력 2월 5일, 세 사람이 청주 초수리에서 돌아왔다. 전 목사 김췌, 전 만호 유면, 전 현감 정중건이었다. 세종은 이들을 그곳에 보내 물로 목욕하며 눈병을 치료해 보게 했다. 돌아온 사람들이 아뢴 말은 짧았다.

眼疾小差。

“눈병이 조금 나았습니다.”2

‘나았다’ 앞에 소(小), ‘조금’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완쾌했다는 보고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짧은 결과 뒤로 조사가 더 이어졌다. 같은 물을 마신 사람들 가운데 효험을 보았다는 이도, 아무 효험이 없었다는 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후추 맛이 난다는 물

이야기는 열흘가량 앞서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세종에게 청주에 후추처럼 톡 쏘는 맛이 나는 물이 있다고 아뢰었다. 그래서 이름도 초수(椒水), 곧 ‘후추 맛이 나는 물’이라고 했다. 목천과 전의에도 이런 물이 있으며 여러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1

세종은 안질을 치료하려고 내섬시 윤 김흔지를 보내 행궁을 마련하게 했다.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아뢴 사람에게는 목면 열 필을 내렸다. 소문을 들은 데서 곧바로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먼저 눈병이 있던 김췌·유면·정중건을 보내 목욕하게 했고, 이들은 ‘조금 나았다’고 돌아와 보고했다.

그해 봄 세종도 청주의 초수에 머물렀다. 왕을 따라간 사람들 가운데에는 물을 마셔 본 이들이 있었다. 몇 달 뒤 세종이 충청도 관찰사에게 내린 유시에는 그 반응이 한데 모여 있다.

나은 사람, 낫지 않은 사람, 설사를 겪은 사람

세종 26년 음력 6월 7일의 기록이다. 세종은 초수로 눈을 씻어 효험을 본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물을 마신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달랐다.

或有得效者,或有無效者,或得泄瀉,未久還愈者。……亦未可的知也。

“효험을 본 사람도 있었고, 효험이 없던 사람도 있었으며, 설사를 했다가 오래지 않아 회복된 사람도 있었다.……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3

전 중추원사 윤번은 한 달을 마셨지만 끝내 효험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세종은 이처럼 결과가 다른 이유를 더 알아보려 했다. 누가 무슨 병을 앓았고, 누가 나았으며, 누가 낫지 않았는지를 자세히 물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원문에는 “아무개는 아무 병이 나았고, 아무개는 아무 병이 낫지 않았다”는 식으로 조사 항목까지 들어 있다. 누가 어떤 병으로 물을 썼고 이후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하려 했다. 좋아졌다는 사례만 모으지 않고 효과가 없던 경우와 몸의 불편도 함께 적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기록을 오늘의 임상시험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환자의 진단 기준과 치료 방법, 관찰 기간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비교군도 없다. ‘효험’이 무엇을 뜻하는지 공통 척도로 정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소문을 그대로 결론으로 삼지 않고, 서로 다른 결과를 구분해 다시 확인하려 했던 왕실 의료의 한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이름이 남은 두 환자

윤7월 22일에는 눈병을 앓던 이내은동과 김을생 등이 전의의 초수로 떠났다. 실록은 이들에게 치료를 받게 하여 다시 시험하고, 전의현에서 옷을 내리게 했다고 기록한다.4

遣眼疾人李內隱同、金乙生等于全義椒水,治療以試之,仍命本縣賜衣。

“눈병이 있는 이내은동·김을생 등을 전의 초수로 보내 치료하여 시험하게 하고, 그 고을에 명하여 옷을 내리게 했다.”4

이 기사는 두 사람의 신분이나 눈병의 구체적인 양상을 알려 주지 않는다. 그 뒤 얼마나 머물렀는지,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도 이 기사 안에는 없다. 이름과 이동, 치료를 시험했다는 사실, 그리고 옷을 마련해 주었다는 기록만 남았다. 결과가 적혀 있지 않은 자리를 후대의 전설로 채울 수는 없다.

왕에게도 봄과 가을의 결과가 달랐다

이듬해인 1445년 음력 2월 18일, 충청도 감사 김조는 세종에게 다시 초수로 오기를 청했다. 그가 전한 경과도 한결같지 않았다. 지난해 봄에는 효험이 있었지만 가을에는 효험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었다.5

김조는 계절에 따라 물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자신의 해석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것은 감사의 설명이지, 물의 성분이나 치료 효과를 확인한 결과가 아니다. 세종은 그해 다시 초수로 가자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그는 오래된 병이 초수에서 반드시 나을지 알 수 없고, 왕의 행차가 백성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고 말했다.6

실록에는 초수를 쓰고 조금 나았다는 첫 보고부터 효험이 없거나 설사를 했다는 반응까지 남아 있다. 두 환자를 다시 보내 시험했고, 왕 자신도 봄과 가을에 서로 다른 결과를 겪었다. 세종은 그런 보고를 듣고 환자별 경과를 더 알아보게 했다.

오늘의 ‘안질’은 하나의 진단명이 아니다. 건조감·염증·각막 문제·시력 변화처럼 서로 다른 상태가 포함될 수 있으므로, 초수 기록을 특정 안과 질환의 치료 근거로 바꾸어 읽을 수 없다. 옛 기록의 목욕·세안·음용을 그대로 따라 하는 자료도 아니다. 갑작스러운 시력저하나 심한 통증·충혈·눈부심은 현재의 안과 평가 기준으로 살펴야 한다.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세종은 그렇게 말한 뒤, 나은 사람과 낫지 않은 사람의 이름과 병을 각각 적어 보고하게 했다.

함께 읽기

출전과 참고 자료

아래 날짜는 음력이다. 짧은 한문 인용의 구두점과 한국어 풀이는 이 글에서 작성했다.


  1.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권103, 세종 26년 1월 27일 여섯 번째 기사. ‘水味如椒,名爲椒水’라는 이름 설명과 안질 치료를 위한 행궁 준비 기록을 확인했다. “여러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은 기사 속 제보자의 주장이다. ↩

  2.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권103, 세종 26년 2월 5일 두 번째 기사, 태백산사고본 33책 103권 15장 B면. 김췌·유면·정중건을 청주 초수리에 보내고 돌아온 이들이 ‘眼疾小差’라고 보고한 기록이다. ↩

  3.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권104, 세종 26년 6월 7일 첫 번째 기사, 태백산사고본 33책 104권 27장 B면. 효험 유무와 설사, 윤번의 한 달 음용, ‘亦未可的知也’ 및 환자별 병과 경과를 조사하라는 유시를 확인했다. ↩

  4.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권105, 세종 26년 윤7월 22일 두 번째 기사, 태백산사고본 34책 105권 22장 B면. 이내은동·김을생 등을 전의 초수로 보내고 옷을 내린 기록이다. ↩↩

  5.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권107, 세종 27년 2월 18일 첫 번째 기사, 태백산사고본 34책 107권 12장 A면. 충청도 감사 김조가 전한 봄·가을의 서로 다른 경과와 재행차 요청, 세종의 거절을 확인했다. 계절에 따른 물의 차이는 김조의 해석으로 구분했다. ↩

  6.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권105, 세종 26년 7월 13일 두 번째 기사, 태백산사고본 34책 105권 5장 B면. 세종이 오래된 병의 불확실한 효험과 가뭄·행차의 민폐를 이유로 초수행 중지를 말한 기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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