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 이제마, 병서를 읽고 의서를 쓰다¶
민성의담 · 사상의학 이야기 08
군관과 현감을 지낸 사람은 어떻게 환자를 살피고 의학을 남겼을까
이제마(李濟馬)는 환자를 보고 의서를 쓰던 사람이면서, 군관으로 일하고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린 관리이기도 했다. 그의 이력에는 무과(武科), 무위별선군관(武衛別選軍官), 진해현감(鎭海縣監)이라는 이름이 차례로 나온다. 무과는 무관을 뽑던 과거이고, 군관은 군사 업무를 맡던 관리다. 현감은 고을의 살림과 행정을 책임지는 지방관이었다.1
그의 호 동무(東武)에도 무(武) 자가 들어 있다. 우리가 흔히 사상의학의 창시자로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군사와 행정의 현장을 거친 이력이 있었던 셈이다. 남긴 글을 보면 병서(兵書), 곧 군사를 다루는 책도 읽었다. 의학과 군사학, 사람과 세상을 다스리는 공부가 그의 삶에서 함께 이루어졌다.6
이 이력을 알고 『동의수세보원』을 읽으면, 책에 등장하는 환자들도 새삼 눈에 들어온다. 밥을 먹을 때마다 땀을 흘리던 아이, 설사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소녀, 큰 병을 앓고 다시 방 안에서 일어선 사람. 이제마는 사람마다 다른 평소 상태를 적고, 약을 쓴 뒤 무엇이 달라졌는지 오래 살폈다.
여러 지역에서 사람을 만나고, 고을의 사정을 살피고, 환자를 치료했던 삶. 그 경험이 의학자로서의 이제마를 이해하는 데 왜 중요한지, 그의 이력과 의서에 남은 기록을 함께 읽어 보자.
무과에 오른 사람, 군관으로 일한 사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제마는 1875년 무과에 등용되었고, 이듬해 무위별선군관으로 일했다. 뒤에는 경상도의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고향 함흥에서 보원국(保元局)이라는 한약국을 경영했다.1
함흥 출신의 사람이 군관과 지방관을 거쳐 다시 고향에서 의업에 힘썼다. 그 사이 생활한 곳도, 맡은 일도 달라졌다. 그의 의학을 이해하려면 의서를 쓴 시기와 관직 생활을 나란히 볼 필요가 있다. 군사와 행정을 맡았던 동안에도 공부는 이어졌고, 뒤에는 진료와 저술이 더욱 깊어졌다.
오늘의 군 복무에 빗대기보다는, 당시 어떤 관직에 있었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따라가면 이해하기 쉽다. 이제마에게 무관의 경력은 고을을 다스리는 일로 이어졌고, 사람의 삶을 살피는 경험도 그만큼 넓어졌다.
그는 의서와 유교 경전뿐 아니라 군사학의 책도 읽었다.
병서를 읽었다는 흔적이 글 속에 남았다¶
2019년 『한국의사학회지』에 실린 연구는 『동무유고(東武遺稿)』의 「지풍조(知風兆)」를 병서들과 비교했다. 동무유고는 이제마가 남긴 글을 모은 자료다. 연구자들은 문장을 대조하여 그가 『무비지(武備志)』를 읽고 발췌한 흔적을 밝혔다. 또 다른 저술 『격치고(格致藁)』의 「유략(儒略)」에서는 병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인용을 짚었다.6
무관으로 일했다는 이력뿐 아니라 읽고 옮겨 적은 문장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군사학은 그에게 일찍 지나쳐 버린 관심사가 아니었다. 연구자들은 그의 사상이 형성되던 시기부터 말년까지 군사학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다고 보았다.6
같은 연구는 이제마를 이해할 때 경세론(經世論)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경세론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방도를 찾는 공부다. 사람의 병을 돌보는 일과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을 보살피는 일이 그의 관심 안에 함께 있었다고 읽을 수 있다.
군진의학과 연결해 궁금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다만 여기서 확인한 자료는 무관 경력과 병서 독서에 관한 것이며, 특정 전투에서 부상병을 치료한 군의관 기록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그가 실제로 거친 관직과 남긴 글을 따라, 여러 분야의 공부와 경험이 한 의학자에게 어떻게 모였는지 살펴본다.
진해현감의 부임과 인수인계 사이¶
진해현감으로 일한 시기에는 조금 자세히 들여다볼 사정이 있다. 2020년 연구는 관청 기록인 『각사등록(各司謄錄)』의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 관원의 이력을 담은 『외안(外案)』, 진해의 읍지를 대조했다. 연구에 따르면 이제마는 1887년 2월 진해에 부임했다. 1888년 6월 이임 조치가 내려졌지만, 후임자가 도착할 때까지 일을 맡아 1889년 상반기까지 현감직을 수행했다.7
인사 명령이 내려진 날과 실제로 자리를 넘긴 날이 달랐던 것이다. 재임 기간을 다르게 적은 자료들이 있는 이유도 이 과정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시절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같은 연구는 1887년 6월과 12월, 1888년 6월에 이루어진 세 차례의 포폄(褒貶)을 살폈다. 포폄은 관리의 일을 정기적으로 평가하던 절차다. 서로 다른 두 상관에게서 직무 수행 능력을 높게 평가받았다는 점이 확인되었다.7
이 평가는 이제마가 살아서 현감으로 일하던 당시에 이루어졌다. 후대의 명성을 빌린 칭찬에 앞서, 맡은 일을 잘 해냈다는 동시대의 기록이 있는 셈이다. 연구자들은 평가에 나타난 관리로서의 역량을 그가 공부한 경세학과도 연결해 해석했다.
현감에게 고을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야 할 주민이었다. 한 사람의 병과 한 고을의 살림을 모두 관심에 두었던 그의 삶을 생각하면, 훗날 의학을 널리 보급해야 한다고 쓴 말도 더 가깝게 다가온다.
여러 사람을 만난 경험, 서로 다른 환자의 기록¶
군관과 지방관으로 일하며 이제마는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생활했다. 사는 곳이 바뀌고 맡은 일이 달라지면 마주치는 사람들의 사정도 달라진다. 이런 삶은 의학자로서 다양한 환자를 접하고 치료 경험을 쌓을 기회도 넓혀 주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2
그가 남긴 의안에서는 실제로 서로 다른 환자들을 만난다. 열한 살 소음인 아이는 평소 설사를 하다가 새 병에서 열과 많은 땀, 대소변의 불편을 겪었다. 열일곱 살 소양인 소녀에게는 오래된 식체·복통과 새로 생긴 심한 설사가 있었다. 평소 목이 건조하던 태음인 환자는 온병을 앓은 뒤 한동안 회복을 위한 조리가 필요했다.3
환자를 살핀 내용도 각기 다르다. 아이에게서는 땀과 소변, 다시 앉고 걷는 모습을 적었다. 소녀에게서는 설사 횟수와 함께 잠과 배뇨의 변화를 남겼다. 태음인 환자에게서는 숨과 가래, 식사,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길게 기록했다. 사람을 나누는 이론만으로는 담기 어려운, 진료실의 구체적인 사정들이다.
이제마 연구자 이기복은 그의 병증과 약물 체계가 임상 경험과 오랜 연구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앞선 의학의 경험을 살피고 자신의 진료에서 얻은 판단을 정리하면서, 실제 치료에 쓸 수 있는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다.4
그래서 무관·지방관 경력의 의의를 이야기할 때에는 넓어진 생활 경험과 책에 남은 임상 관찰을 함께 볼 만하다. 여러 처지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삶, 환자마다 다른 경과를 자세히 살핀 진료, 그 경험을 후학이 배울 수 있게 남긴 저술이 이어진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았는가에 더해, 그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배워 기록했는가가 이제마 의학의 가치를 잘 보여 준다.
익숙한 처방에서 세 가지를 빼고, 세 가지를 더하다¶
환자를 살피며 얻은 판단은 약을 고쳐 쓰는 일로도 이어진다. 『동의수세보원』의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 대목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今考更定,此方當去桔梗白芷白茯苓,當用桂皮乾薑益智仁。
“이제 살펴 다시 정하니, 이 처방에서는 길경·백지·백복령을 빼고 계피·건강·익지인을 써야 한다.”8
경정(更定)은 다시 고쳐 정한다는 뜻이다. 이제마는 앞선 처방을 검토한 뒤 길경·백지·백복령을 빼고 계피·건강·익지인을 쓰도록 했다. 어떤 약을 바꾸려 했는지 여섯 약재의 이름을 분명하게 적었다.
이 문장은 기존 처방을 소개한 뒤에 붙인 이제마의 수정 의견이다. 앞의 구성과 뒤의 지시를 나란히 놓으면, 익숙한 처방을 자신의 의학에 맞게 손보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원문과 풀이에서도 어느 약을 빼고 더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길경은 도라지의 뿌리이고, 건강은 말린 생강이다. 한약은 여러 재료를 함께 쓰는 약이므로 한 가지를 바꾸면 전체 배합도 달라진다. 이제마는 소음인의 병을 설명하면서 기존 곽향정기산의 구성을 다시 검토했고, 그 결과를 약재 이름으로 남겼다.
같은 이름의 처방을 읽을 때 출전과 구성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 구절에는 여섯 약의 변경이 적혀 있고, 전체 구성과 분량은 다른 수록 내용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곽향정기산 처방 문서와 원방·수정안의 구분에 그 차이를 정리했다.
이제마 의학의 또 다른 의의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앞선 의가의 경험을 배우되, 치료에 필요한 부분을 다시 따져 처방을 고쳤다. 배운 지식을 진료에 적용하고, 거기서 얻은 판단을 다시 책에 담는 작업이었다.4
네 체질의 이름 뒤에 ‘그 증’을 붙인 이유¶
환자마다 다른 사정을 어떻게 처방에 반영할 것인가. 이제마는 책 뒤쪽 「사상인변증론(四象人辨證論)」에서 사람을 구별하는 일과 현재의 병증을 살피는 일을 함께 강조했다.
明知其人而又明知其證
“그 사람을 분명히 알고, 또한 그 증을 분명히 안다.”9
기인(其人)은 ‘그 사람’, 기증(其證)은 ‘그 증’을 뜻한다. 사이에 놓인 우(又)는 ‘또한’이다. 어떤 사람인지를 살피고, 지금 어떤 병을 앓는지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어지는 문단에서는 겉모습을 자세히 헤아리고 거듭 살피며, 판단이 분명하지 않으면 병증과 대조한 뒤 약을 쓰라고 했다. 사람의 특징을 파악하는 일과 현재의 병을 진찰하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처방을 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9
오래 쓰인 처방도 환자의 병에 맞게 검토하고, 같은 체질 안에서도 지금 나타나는 증상을 자세히 살핀다. 곽향정기산을 고친 대목과 ‘그 사람, 그 증’이라는 문장이 이렇게 이어진다.
여러 사람을 접한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배우는 바탕이 될 수 있다. 이제마의 의서에서는 그 차이를 실제 진찰과 약의 선택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개인차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뿐 아니라, 그것을 치료에 쓸 수 있도록 병증과 처방으로 정리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4
치료를 시작한 뒤에도 기록은 계속된다¶
사람과 병증을 함께 살피라는 문장은 책의 병례에서 한층 구체적이 된다. 앞선 이야기에서 만났던 태음인 환자는 평소 목이 건조하면서 몸이 차고 때로 설사를 했다. 이제마는 이 오래된 상태와 새로 생긴 온병을 함께 적었다. 온병은 옛 의학에서 다루던 발열성 질병의 범주다.10
그 기록에는 한다열소탕을 쓴 일, 병중의 땀과 호흡, 죽을 먹은 날, 다시 방 안에서 일어선 날이 차례로 나온다. 위중할 때 웅담산을 생각했으나 약재가 없었다는 사정도 남아 있다. 실제 투여한 약과 검토만 했던 약을 독자가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세세하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일어선 뒤의 기록이다. 여러 증상이 안정되어도 귀가 들리지 않는 불편은 남았다. 그 뒤 조리폐원탕으로 마흔 날을 조리한 경과가 이어진다. 처방을 골랐다는 사실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다. 약을 쓴 다음 먹고 숨 쉬고 움직이는 일이 어떻게 달라졌는지가 의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 의안은 당시 한 환자에게서 관찰한 경과다. 오늘의 진단명이나 치료 효과의 크기를 판단할 자료와는 구분하되, 이제마가 무엇을 살폈고 왜 치료를 이어 갔는지 알아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목이 마르던 사람, 긴 병을 건너 다시 일어서다」에 실었다.
이런 기록이 남았기에 뒤의 독자들도 치료의 과정을 따라갈 수 있다. 어떤 약을 썼는지뿐 아니라 먹고 숨 쉬고 움직이는 일이 언제 나아졌는지, 어느 불편은 더 오래 남았는지까지 배울 수 있다. 치험을 글로 남긴다는 것은 한 사람을 돌본 경험을 다른 의원과 후학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1894년에 끝난 책, 다시 끝나지 않았던 책¶
『동의수세보원』을 1894년의 책이라고 소개하는 말을 자주 만난다. 저술의 중요한 시점이라는 점에서는 맞지만, 그해에 지금 읽는 책이 모두 인쇄되어 나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시간이 엇갈린다.
장서각에 소장된 1901년본의 해제는 초고를 1893년에 쓰기 시작하여 1894년에 마쳤다고 설명한다. 이후 이제마는 내용을 다시 고쳤고, 1900년에도 개정을 이어 갔다. 원고를 고치는 도중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전하는 책에는 개정한 부분과 초고 형태로 남은 부분이 함께 있다.11
1894년에 초고를 마친 뒤에도 책은 계속 바뀌었다. 이제마는 진료와 연구를 이어 가며 이미 쓴 내용을 다시 검토했다. 한 번 세운 학설을 간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병론과 처방을 고쳐 후학에게 전하려 했던 것이다.4
저자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01년, 함흥에서 문인들이 사재를 모아 책을 찍었다. 장서각에 남아 있는 초간본은 네 권을 두 책으로 묶은 목활자본이다. 이제마가 남긴 의학을 다음 사람에게 전하려는 제자들의 뜻이 이 간행으로 이어졌다.11
이 글의 짧은 한문 인용은 아카이브에 수록된 1941년 석판본 계열의 원문을 따랐다. 책이 처음 나온 1901년과 실제 인용에 사용한 판본의 연도는 구분해 두었다.
마지막에는 그릇 만드는 사람의 비유가 나온다¶
『동의수세보원』 「사상인변증론」에는 그릇을 만드는 사람의 비유가 나온다. 만 호가 사는 고을에서 한 사람만 그릇을 만들면 그릇이 모자란다. 마찬가지로 백 가구의 마을에서 한 사람만 의술을 행하면 사람들을 충분히 돌보기 어렵다는 말이다.12
고을을 맡아 다스렸던 이제마가 이런 비유를 남겼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뛰어난 의원 한 사람이 있는 것과 마을 사람들이 필요할 때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이제마는 의학을 아는 사람이 널리 생겨나기를 바랐다.
家家知醫,人人知病
“집집마다 의술을 알고, 사람마다 병을 안다.”12
의술을 배우는 사람이 많아지고, 병을 이해하는 지식이 집집마다 전해지기를 바라는 말이다. 이어지는 수세보원(壽世保元)은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오래 이어 가고 그 근원을 보전한다는 뜻으로 풀어 읽을 수 있다.
이기복은 이제마가 지역과 시대, 성별과 분과를 넘어 모든 사람을 위한 의학을 지향했다고 해석했다. 여러 처방을 모으는 데서 더 나아가, 사람마다 다른 병을 이해하고 치료할 수 있는 의학을 세우려 했다는 평가다.5
군관과 지방관으로서 넓힌 견문, 진료에서 쌓은 경험, 처방을 고쳐 쓴 연구가 『동의수세보원』에 모였다. 그리고 제자들이 책을 펴내면서 그 의학은 이제마를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전해졌다.
그가 보았던 환자들의 이름은 대부분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이가 다시 죽을 먹고, 소녀가 편안히 잠들고, 오래 앓던 사람이 방 안에서 일어서는 모습은 지금도 책에 남아 있다. 제자들이 펴낸 책 덕분에, 이제마가 이 환자들을 어떻게 살피고 치료했는지 오늘도 배울 수 있다.
이어 읽기¶
- 이제마와 사상의학 — 인물에서 체질·병증·처방으로
- 사람과 병증을 함께 살피는 원문 — 짧은 인용 앞뒤의 문맥
- 곽향정기산의 수정 원문 — 빼는 약과 더하는 약
- 『동의수세보원』의 판본과 형성 — 저술·개정·간행의 구별
출전과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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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제마」. 호 동무, 1875년 무과 등용, 1876년 무위별선군관, 진해현감 경력과 말년 함흥 보원국 운영을 참고했다. 진해 재임 기간은 아래 관찬 사료 연구의 정리를 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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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지방관으로서 생활 반경과 사람을 만나는 기회가 넓어졌으리라는 서술은 확인된 관직 이력에 기초한 해석이다. 직책 때문에 진료 환자 수나 치험례 수가 얼마나 늘었는지를 입증하는 진료 명부·수량 자료를 확인한 것은 아니다. 아래 의안의 환자와 경과는 『동의수세보원』에 기록된 내용과 별도로 대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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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수세보원』 「소음인신수열표열병론」의 열한 살 아이 의안(통행 조문 6-32), 「소양인비수한표한병론」의 열일곱 살 소녀 의안(9-44), 「태음인위완수한표한병론」의 목 건조·온병 의안. 소증의 개념에 대한 고찰, 『사상체질의학회지』 28(1), 2016, 19–26의 원문 인용·주석 및 아래 태음인 원문을 참고했다. 본문의 각 이야기 링크에서 해당 의안의 인용 자료와 치료 경과를 이어 읽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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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복, 「실행 층위에서 본 이제마(李濟馬, 1837-1900)의 의학: 동아시아 의학 체계의 재구성」, 『의료사회사연구』 2, 2018, 33–73. DOI: 10.32365/KASHM.2018.2.2. 공개 초록의 임상 경험·연구 과정과 병증·처방 재구성에 관한 분석을 참고했다. 관직과 환자 수 사이의 인과관계를 검증한 연구는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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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복, 『동무 이제마(1837-1900)의 의학 사상과 실천: 동아시아 의학 전통의 재구성과 “천인성명 장부의학”의 탄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공개 국문 초록의 의약경험 중심 재구성과 보편의학 지향에 관한 해석을 참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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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운·황지혜·김남일, 「『東武遺稿‧知風兆』를 통해 본 이제마의 군사학적 배경이 그의 의학 사상에 미친 영향」, 『한국의사학회지』 32(2), 2019, 29–41. DOI: 10.15521/jkmh.2019.32.2.029. KCI 공개 초록에서 병서 대조 결과와 『격치고』의 인용, 군사학·경세론을 함께 보자는 연구자의 해석을 확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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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운·황지혜·하동림, 「진해현감 이제마와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에 관한 연구 — 官側 사료 『各司謄錄』 「統制營啓錄」과 『外案』 및 『鎭海郡邑誌』 「官蹟邑先生案」을 중심으로」, 『한국의사학회지』 33(1), 2020, 79–97. KCI 공개 초록의 부임·이임·후임 부임 시점과 세 차례 포폄의 분석을 참고했다. 관찬 사료의 원문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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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마, 『동의수세보원』 소음인 처방 수록부의 곽향정기산 논평. 아카이브의 1941년 석판본 대조 원문·자체 풀이, 공개 PDF 75쪽. 인용의 구두점과 한국어 풀이는 자체 작성했다. 선행 수록방과 이제마의 수정 의견을 구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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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 권4 「사상인변증론」. 아카이브의 원문·자체 풀이와 반복 감별의 다음 문단, 1941년본 PDF 191쪽. 본문의 첫 인용은 한 문장의 앞부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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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 권4 「태음인위완수한표한병론」의 ‘有一太陰人素病咽嗌乾燥’ 의안. 아카이브의 경과 원문, 1941년본 PDF 149쪽부터 151쪽. 여기서는 앞선 07편과 원문에 있는 관찰·처방·회복의 흐름을 간추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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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장서각, 『동의수세보원』 K3-328 해제. 1893–1894년 초고, 1900년 개정, 사후인 1901년 함흥의 문인들에 의한 목활자 간행을 구분했다. 인용 대조본의 서지는 Wikimedia Commons의 1941년 석판본 정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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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 권4 「사상인변증론」. 아카이브의 원문·자체 풀이, 1941년본 PDF 193쪽. 그릇 만드는 사람과 의술을 행하는 사람의 비유를 요약하고 이어지는 짧은 구절을 인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