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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향을 바치던 고을에 내려온 뜻밖의 명령

민성의담 · 스물두 번째 이야기

귀한 약재를 마련하는 일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고을의 소속이 바뀌었는데, 그 고을이 바치던 약재는 누가 마련해야 할까.

1869년, 고종 6년 음력 11월 29일의 『고종실록』에는 이런 문제가 올라왔다. 북병사 이종승은 후주가 다른 도에 속하게 되었으니, 그곳에서 진상하던 녹용과 사향을 다른 고을에 배정해 올리게 하자고 건의했다.1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면 서류에는 새 고을 이름이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왕의 답은 달랐다. 다른 곳으로 부담을 옮기는 대신 그 진상을 없애라고 했다.

처방전에는 없던 고을 이름

사향은 공진단 이야기에서 만났던 약재다. 처방을 읽을 때에는 다른 약재와 어떤 배합을 이루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실록에서는 사향 옆에 전혀 다른 말이 붙는다. 어느 고을이 얼마만큼의 일을 떠맡느냐는 문제다.

이종승의 보고에서 눈에 띄는 표현은 ‘이정타읍(移定他邑)’이다. 다른 고을로 옮겨 정한다는 뜻이다. 행정구역을 바꾸는 일이 약재를 마련할 의무의 배분과도 맞물려 있었다.1

왕은 후창이 관서에 속하게 된 사정을 인정하면서도, 북관 백성들의 형편을 걱정했다. 특히 옮겨 배정하는 과정에서 폐단이 더해질 것을 우려했다. 답의 끝은 짧고 분명하다.

使之永永革罷,期有實惠之及民。

“이를 영구히 없애어, 실제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도록 하라.”1

없애라고 한 것은 이때 논의한 해당 진상 부담이다. 조선 전체의 사향 사용이나 유통을 중단했다는 뜻은 아니다. 기록에는 그렇게 명령한 사실이 남아 있으며, 이후 각 고을에서 어떻게 집행했는지까지 적혀 있지는 않다.

그래도 건의와 답을 나란히 읽으면 차이가 또렷하다. 신하는 계속 약재를 올릴 수 있도록 담당 고을을 바꾸자고 했고, 왕은 그 몫을 아예 덜어 주라고 했다. 궁궐로 가는 약재를 이야기하던 자리에 약을 마련할 사람들의 생활이 들어온 것이다.

세종 때에는 구해 달라는 요청부터 막았다

사향을 아껴 다룬 기록은 훨씬 앞에도 보인다. 1425년, 세종 7년 음력 8월 28일이다. 세종은 용뇌·사향·주사·소합유 등의 약재를 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요청을 아뢰지 말라고 내약방의 대언에게 명령했다.2

이때의 실록은 해당 약재들이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희귀하다는 이유를 덧붙였다. 적어도 그 기록 속에서는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내어 주기 어려운 재료들이었다.

다만 이 한 문장을 근거로 조선의 사향이 언제나 전량 수입품이었다고 넓혀 말하면 곤란하다. 뒤의 고종 때 기록에는 지방에서 맡아 올리던 사향이 등장한다. 시대도 다르고 기록이 다루는 공급 사정도 다르다. 두 기사를 함께 읽으면, ‘귀했다’는 말 하나로는 긴 세월의 약재 유통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귀한 약의 다른 쪽

옛 약재가 귀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금은보화 같은 값어치나 특별한 효능을 먼저 상상하기 쉽다. 그런데 이 두 기록이 보여 주는 것은 조금 더 생활에 가깝다. 한쪽에서는 약재를 달라는 요청을 제한했고, 다른 쪽에서는 약재를 바칠 의무를 없애라고 했다.

실록의 두 기사만으로 당시 사향의 가격이나 거래량을 알아낼 수는 없다. 귀하게 취급했다는 사정이 오늘의 치료 효과를 입증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누가 약재에 접근할 수 있었고 누가 그것을 마련해야 했는지는 묻게 된다.

1869년의 보고로 돌아가 보자. 다른 고을을 정해 계속 올리자는 건의 끝에, 그 일을 없애라는 명령이 붙었다. 그날 기록에서 사향은 환자에게 투여된 약이 아니라 누군가의 몫에서 덜어 주려 한 일이었다.

약재가 사람의 손을 거쳐 온 내력은 세종이 약초를 캔 사람의 이름까지 적게 한 이야기에서도 이어진다. 처방전에 적히기 전, 약에는 이미 여러 사람의 일이 묻어 있었다.

출전과 참고 자료


  1.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실록』 권6, 고종 6년 11월 29일 세 번째 기사, 「후창의 녹용과 사향의 공물을 혁파하도록 하다」. 원문의 보고에는 ‘厚州’, 왕의 답에는 ‘厚昌’이 쓰여 있어 각각 후주·후창으로 표기했다. 날짜는 음력이다. 한문을 바탕으로 직접 요약·번역했으며, 명령과 실제 집행 여부를 구분했다. ↩↩↩

  2.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권29, 세종 7년 8월 28일 첫 번째 기사. 원문 ‘雖有求者勿啓’와 뒤의 희귀성 설명을 직접 풀었다. 날짜는 음력이며, 해당 기사의 서술을 조선 전 시기의 산지·조달 경로로 일반화하지 않았다. ↩